<1편에서 계속>
6. 닛산과의 인연
카를로스 곤에게 닛산 개혁 책임이 맡겨진 건 1999년 6월이다. 경영 위기에 빠진 닛산이 르노에 제휴를 제의한 것이다. 르노는 당시 3중고(시장점유율, 적자, 부채)를 안고 있었다.
1991년 6.6%이던 닛산의 시장점유율은 1999년 당시 4.9%로, 1.7%포인트나 하락했다. 생산대수는 1991년과 비교해 60만대 이상이 감소했다. 거기다 많은 부채까지 안고 있었다. 그때까지 8년 동안 7회의 적자 경영을 기록하자 주거래 은행들은 닛산에 대출을 기피했다.
그렇게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자 르노에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1999년 3월, 두 회사간에 자본 제휴가 이뤄졌다. 르노는 닛산의 주식 36.8%를 취득하고 닛산의 제1주주가 됐다. 경영권을 장악할 수 있는 3분의 1을 초과한 것. 닛산은 르노로부터 6430억 엔의 자본을 받아들였다.
(현재 르노는 닛산에 43.4%, 닛산은 르노에 15%를 각각 출자하고 있다. 프랑스 법률에 따라 닛산이 가진 르노 주식은 의결권이 없다. 두 회사의 시총은 오히려 닛산이 약 42조, 르노가 약22조로, 두 배나 차이가 난다.)
르노의 루이 회장은 자사 재건에 훌륭한 솜씨를 발휘했던 수석 부사장 카를로스 곤과, 함께 일했던 간부 3명을 닛산 경영진으로 파견했다. 곤은 닛산 자동차의 COO(최고집행책임자)로 취임했다.
일본 진출 4개월 뒤인 1999년 10월에는 도쿄 로열파크 호텔에서 ‘닛산 리바이벌 플랜’을 발표했다. (플랜은 무라야마 공장 등 5개 공장 폐쇄, 거래하는 부품 메이커 수를 반으로 축소, 종업원 2만 1000여 명 감축 등을 담고 있었다.) 곤은 2001년 6월에는 CEO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닛산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7. 일하는 스타일
곤은 신속한 의사 결정, 높은 목표 설정, 당근과 채찍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경영자였다. 곤이 오고 나서 닛산 사원들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장님은…”이라고 말하지 않고 “곤은…”이라고 말하게 됐다.
곤은 일본인 경영자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장악하는 뛰어난 기술이 있었다. 많은 사원에게 ‘카리스마적 존재’이면서도 친근감을 불러일으킨 ‘사람 다루기’의 명인이었던 것.
예를 들면 간부가 회의에서 자료를 제출하면 “그런 정도로는 안된다”고 몇 번이나 되돌리고 매우 엄격한 주문을 했다. 그래서 고생고생해서 다시 고쳐 가면 “잘했다. 당신은 대단하다. 덕분에 계획이 상당히 진전되었다”고 칭찬했다.
8. 새 별명
곤은 일본에 와서 또 다른 별명을 얻었다. 종업원들과의 허심탄회한 대화로 인해 ‘아이스 브레이커’(Ice Breaker), 닛산 부활과 관련해 기업회생 예술가(Turnaround Artist)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무엇보다 곤을 잘 설명하는 별명은 따로 있었다. ‘세븐일레븐’이다. 오전 7시에 출근해 밤 11시까지 일한다고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닛산의 간부들은 곤이 맹렬한 경영자라는 것을 순진하게도 잘 몰랐다. 사전정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9. 해외 언론의 주목
닛산을 위기에서 구한 곤은 2001년 시사주간지 타임과 CNN이 각각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CEO’에 올랐다. 이듬해인 2002년에는 경제잡지 포천이 선정한 ‘올해의 기업인’에도 뽑혔다.
10. 어록 몇 가지
곤은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 4가지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고통스런 결정을 내릴 때는 신속하고 결단 있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배웠다. 꾸물거리면 고통만 연장된다.‘
“마법은 없다. 속임수도 없고 비밀도 없다. 최종 성과는 믿을 만한 계획, 강한 의지, 집중력, 훈련 그리고 신속한 실천의 결과물이다.”
“기회는 항상 있지만,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보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계획을 실천할 때 계획은 의미가 있다”
카를로스 곤 회장의 체포로 이제 일본 언론들은 그의 '공과'를 따지는 상황이 됐다. 곤 회장의 20년 장기 집권이 꼴사납게 막을 내리게 됐다. <에디터 김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