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8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일본 영화 경제학㊻/ 닛카쓰의 액션과 성의 혁명 라이프& 일본 영화 경제학㊻/ 닛카쓰의 액션과 성의 혁명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50년대 이른바 ‘태양족’(타이요조쿠, 太陽族) 영화로 일본영화 황금기에 새로운 수익 모델을 만들었던 닛카쓰(日活)는 1960년대 역시 폭력과 무절제, 섹스가 난무하는 영화들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1971년 한 차례 제작이 중지되는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이른바 ‘로망 포르노’(ロマンポルノ) 이후 1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다른 영화사들과 달리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1960년대 닛카쓰를 대표하는 ‘닛카쓰 액션’과 스크린 상의 ‘성(性)의 혁명’ 때문이었다. 19 일본 영화 경제학㊺/ 다이에이의 대작 노선과 몰락 라이프& 일본 영화 경제학㊺/ 다이에이의 대작 노선과 몰락 당시 일본의 영화사들 중 메이저 회사들은 모두 주식회사이면서 주식이 주식시장에 상장되어 있었다. 그중 다이에이(大映)는 쇼치쿠(松竹)나 도호(東宝)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여러 가지 차별화의 길을 걸은 영화사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 사장 체제는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했지만 치명적인 약점들을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다른 메이저 영화사들이 ‘정년 55세’를 고수(지금까지 전통)하고 있을 때 다이에이는 ‘정년 60세’를 관철 시켰다. 그는 한 마디로 독재자였다. 연고 인물이나 아들, 친인척을 채용하고 자신을 ‘카 일본영화 경제학㊹ 쇼치쿠 누벨바그/ 영화혁명 라이프& 일본영화 경제학㊹ 쇼치쿠 누벨바그/ 영화혁명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전 세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근대화, 산업화와 함께 고도성장을 가져오고 나면 좌파가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역설은 일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좌파 지식인의 사상은 경제가 어려울 때는 잘 어필되지 못하다가 ‘먹고 살만 해지면’ 사회적 모순을 주장하면서 대중들에게 퍼져 나간다. 일본 사회 역시 1960년대 초 많은 변화를 경험한다. 회복되기 시작한 경제는 1964년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급성장을 가져왔고 전·후세대의 젊은이들은 문학과, 예술, 외국영화와 함께 프랑스 좌파 지식인들의 일본영화 경제학㊷/ 1960년대, TV에 밀린 침체기 라이프& 일본영화 경제학㊷/ 1960년대, TV에 밀린 침체기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화려했던 1950년대부터 이어진 ‘일본영화 제2의 황금기’를 넘어서 1960년대를 집중적으로 다룰 시기가 되었다. 사실 195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제2 황금기’ 일본영화계는 엄청난 성장을 가져온 게 사실이다. 제작 편수는 연간 500여 편을 넘었으며, 관람객은 연간 12억 명에 육박했다. 쇼치쿠(松竹), 도호(東宝), 다이에이(大映), 도에이(東映), 닛카쓰(日活), 신도호(新東宝)의 6대 메이저 영화사가 활발한 제작을 했다. 기술적으로 기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가 일본방식(후지,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㊵/ 황금기 감독열전(4) 라이프&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㊵/ 황금기 감독열전(4) 여성영화의 명수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여성영화의 명수’(女性映画の名手). 이 말은 일본 영화계에서 나루세 미키오에게 정식으로 붙여준 별칭이다. 지난 회에 언급했던 바와 같이, 당시 일본 영화계의 쌍벽은 쇼치쿠(松竹)의 간판이었던 오즈 야스지로와 도호(東宝)의 나루세 미키오(成瀨巳喜男)라는 것이 정설이다. 비록 해외 영화제의 굵직한 수상 경력은 없다 하더라도 ‘키네마준보&#39;(キネマ旬報) 1위라는 일본 관객들과 평단의 지지가 있었고 흥행이 있었기에 지금까지도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㉝/ 전후 황금기11(닛카쓰) 라이프&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㉝/ 전후 황금기11(닛카쓰)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닛카쓰 주식회사(日活株式会社; Nikkatsu Corporation)는 일본의 영화 제작·배급 회사로, 초창기 일본영화사에서 쇼치쿠(松竹)와 양대 산맥을 이뤘던 유서 깊은 제작사였다. 그러나 전후 황금기에 있어서 가장 창조적인 발상으로 재기를 하게 된 경우에 속한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당시 일본 영화계는 기존 5개 메이저 영화사(도호, 도에이, 쇼치쿠, 다이에, 신도호)들이 맺은 협정(필자의 연재물 전후황금기 4편 참조)으로 인해 배우 수급에 문제가 많았다.1954년 제작을 재개 할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㉚/ 전후 황금기8 라이프&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㉚/ 전후 황금기8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의 국제영화제 출품 러시일찍이 일본의 배우이자 도호(東宝)의 사장이었던 시미즈 마사오(清水将夫)는 “영화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지는 않지만 흥행수입을 보면 곧 좋고 나쁜 영화를 구분해 낼 수 있다(Donald Rich의 말을 인용)”고 했다. 일본영화의 전후 황금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양적인 성장을 이뤄냈을 뿐만 아니라 야망을 가진 감독들이 그들의 기량을 펼쳐 보이며 할리우드와 같은 시스템 구축에도 성공했다는 점이다.당시 영화는 사회적으로 감당할 역할이 있다고 믿었으며 당연히 흥행을 무시해서도 안 된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㉕/ 전후 황금기3 라이프&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㉕/ 전후 황금기3 일본 영화와 한국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을 들자면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일본영화는 ‘과거와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메이크는 물론이거니와 과거의 암울한 시대를 극복한 스토리들을 자주 소재로 삼는다.예를 들어 ‘올웨이즈-3번가의 석양’(Always 三丁目の夕日: Always-Sunset On Third Street, 2005), ‘플라워즈’(フラワーズ, Flowers, 2010, 기무라 타쿠야의 드라마 ‘남극대륙’(南極大陸, 2011) 같은 전후 극복기 혹은 메이지 유신 시기 등의 영화나 드라 처음처음1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