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8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일본영화 경제학(62)/ 욕정과 광기’의 미학 다나카 노보루 라이프& 일본영화 경제학(62)/ 욕정과 광기’의 미학 다나카 노보루 ‘다나카 노보루’(田中登)감독은 제7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의 클래식 부문(베니스·클래식스)에 있어서 1974년의 작품 ‘(비) 색정 암컷 시장’(㊙色情めす市場)의 4K 디지털 복원 판이 선출되어 상영되었다. 그는 닛카쓰(日活) 로망포르노(ロマンポルノ) 사상 최초로 세계 3대 영화제에 초청 받았으며 평단의 지지를 가장 많이 얻어낸 감독이다. 지난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다나카 노보루의 밤’이 열려 화제가 되었고 특히 ‘극으로 치닫는 인간의 광기와 욕망, 성에 대한 집착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는 소개를 남겼다. 물론 로망 일본영화경제학(60)/ 로망 포르노와 핑크 영화계 라이프& 일본영화경제학(60)/ 로망 포르노와 핑크 영화계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1970년대 로망포르노(ロマンポルノ)가 핑크필름(ピンク映画)을 생산하는 이른바 ‘핑크 영화계’를 어떻게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닛카쓰가 제작한 로망 포르노 영화들이 당시 그들만의 직영 극장 네트워크를 통해 배급되었고 차곡차곡 보관되면서 오늘날 DVD로 출시되고 재상영되고 있지만 그 이전까지 영세했던 ‘핑크영화계’는 산업 생태계가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절에도 에로덕션의 영화들을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극장들은 존재했고 닛카쓰의 부족한 물량을 메워 준 것이 바로 핑크영화계였 일본 영화 경제학(59)/ 로망 포르노의 플롯 라이프& 일본 영화 경제학(59)/ 로망 포르노의 플롯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지난 회에 로망포르노(ロマンポルノ)의 여배우들에 대해 언급했다면 이번에는 플롯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닛카쓰의 로망 포르노는 핑크필름(ピンク映画)을 참고로 하였지만 실험 정신적 파생 장르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핑크필름의 감독들이 창조 해 낸 파생 장르 중(나중에 다룰 것이다)에는 ‘핑크 호러’(ピンクホラー映画)도 있었고 정치적인 이슈를 결합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다이에이(大映)가 파산한 그달(1971년 11월)에 로망 포르노 라인을 런칭한 닛카쓰로서는 우선적 일본영화 경제학(58)/ 로망 포르노의 역설 라이프& 일본영화 경제학(58)/ 로망 포르노의 역설 로망포르노(ロマンポルノ, 로맨틱 포르노)가 닛카쓰(日活)에 끼친 공로 중 최고를 꼽자면 적어도 10년간은 감독과 영화 스텝들 그리고 배우들이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핑크 영화 산업은 일본에서는 상당한 규모로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배우들로서는 부담스러운 세계이기도 했다. 배우라면 그리고 감독이라면 누구나 ‘주류’를 꿈꿀 것이다. 그러나 핑크 영화 산업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주류에서 비주류로 전락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의 영화사가 발 벗고 나서서 장르화해 준다면 이야기가 일본영화 경제학(57)/ 새롭게 태어난 닛카쓰 라이프& 일본영화 경제학(57)/ 새롭게 태어난 닛카쓰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사실 일본영화 역사를 이야기할 때 ‘1970년대’는 ‘닛카쓰’(日活)의 독무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70년대 초기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 ‘저예산 고효율’을 목표로 제작된 이 프로젝트는 경영난을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돌파구 역할을 했지만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자면 대형 스튜디오가 장르 영화(로망 포르노)의 틀 안에서 감독들이 고유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당시 중소형 영화사들이 2-3일 만에 만들던 그런 에로영화가 아닌,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들었던 일본영화 경제학(51)/ 핑크필름의 창세기(創世記) 라이프& 일본영화 경제학(51)/ 핑크필름의 창세기(創世記)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일본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인 핑크 필름(Pink film, ピンク映画)에 대하여 일본영화 역사가들은 1962년부터 1971년을 ‘첫번째 물결’(First wave - The ‘Age of Competition’) 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초창기에는 독립영화업자들에게 주목받았던 장르였기 때문이다. 약 300만엔의 저예산, 평균 3일의 촬영 일수라는 열악한 조건이지만 정사 장면의 횟수, 여배우의 노출 횟수만 지키면 마음껏 스크린 속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었다. 관객들은 자신들의 일본영화 경제학㊿ / 핑크 필름의 거장들 컬쳐 일본영화 경제학㊿ / 핑크 필름의 거장들 <미국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구로사와 기요시(黒沢清), 구마시로 다쓰미(神代辰巳), 와카마쓰 고지(若松孝二), 제제 다카히사(瀨瀨敬久), 수오 마사유키(周防正行)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들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거장’(巨匠)이면서 ‘로망포르노 감독’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중 와카마쓰 고지는 ‘에로영화의 제왕’으로 불리울 만큼 탁월한 족적을 남긴 감독이다. 1970년대 이즈미 세이지(堯美木俣), 나카무라 겐지(中村幻児), 이즈쓰 가즈유키(井筒和幸), 다카하시 반메이(高橋伴明) 등 새로운 차세대 일본영화 경제학㊷/ 1960년대, TV에 밀린 침체기 라이프& 일본영화 경제학㊷/ 1960년대, TV에 밀린 침체기 <미국 LA=이훈구 작가(재팬올 미국대표)> 화려했던 1950년대부터 이어진 ‘일본영화 제2의 황금기’를 넘어서 1960년대를 집중적으로 다룰 시기가 되었다. 사실 195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제2 황금기’ 일본영화계는 엄청난 성장을 가져온 게 사실이다. 제작 편수는 연간 500여 편을 넘었으며, 관람객은 연간 12억 명에 육박했다. 쇼치쿠(松竹), 도호(東宝), 다이에이(大映), 도에이(東映), 닛카쓰(日活), 신도호(新東宝)의 6대 메이저 영화사가 활발한 제작을 했다. 기술적으로 기노시타 케이스케(木下惠介)가 일본방식(후지, 처음처음1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