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⑨/ 벤시(辯士)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⑨/ 벤시(辯士)
  • 재팬올(japanoll)
  • 승인 2019.04.05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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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영화가 등장했을 때 관객들은 놀라움과 호기심으로 극장에 모여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벙어리 화면’에 점차 식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관객들이 지루해 하지 않기 위해 영화사와 극장 측은 고심을 거듭한다.

나름대로의 시나리오가 있는 영화들도 관객들이 러닝타임 내내 지루하지 않게 관람 하기 위한 갖가지 고안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미국이나 유럽에서 생각해 낸 방법이 스크린 앞에 피아니스트를 고용하여 화면의 변화에 따라 즉흥적으로 그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연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영화음악의 시초가 되었지만 일본의 경우는 가부키 혹은 야시(香具師, 노점상의 원조)의 전통 때문에 별도의 해설자를 두게 된다. 영화의 줄거리와 중요한 대사를 연기와 섞어가며 관객에게 전달하는 ‘벤시’(변사, 辯士, 말하는 남자)를 통해 발전해 나갔다.

일본영화계가 유럽과 할리우드에서 수업한 젊은 감독들(고나티 헨리, 구리하라 토마스 등)의 영향으로 독립적인 예술로 발전되어 나가기는 했지만, 유럽과 할리우드 방식보다 편리한 방법이 선호되었는데 그게 바로 ‘벤시’였던 것이다.

원래 일본의 영화가 상당 기간 하급예술로 분리되어 계층이 낮은 서민들의 오락수단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자막을 읽지 못하는 문맹인 관객들에게 있어서 벤시의 존재감, 인기는 영화의 흥행 요인과 결합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과 미국의 영화들이 유입되면서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아지고 여배우들이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과 같이, 벤시들 역시 한시적인 영광을 누리게 될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지나치게 서양적’인 영화를 반대함과 동시에 때론 그 인기가 배우와 감독의 명성보다 앞선 경우가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적어도 1920년까지는 벤시들의 횡포와 전횡으로 인해 새로운 기술의 영화들(토키 등)이 거부되기도 했다. 벤시들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러’오는 것이 아니라 벤시의 목소리를 ‘들으러’ 온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토키영화의 발전이 더뎌지게 된 이유도 바로 벤시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서양영화들이 수입되었다 하더라도 관객들이 다른 나라의 언어를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서 변사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 음성을 결합하기 위한 시도는 일본에서도 있었다. 1902년 요시자오하 상점의 가와우라 겐이치(河浦謙一)가 레코드와 필름을 동시에 회전시켜 토키실험을 했고, 1910년대 내내 디스크식 토키에 의한 ‘발성 활동사진’을 시도했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중국의 경우 처럼 북경어, 상해어, 광동어 등 여러 가지 버전이 필요하다거나 서양에서처럼 피아노만 연주하다가 트럼펫, 바이올린 등 악기를 추가하고 심지어 대규모 오케스트라까지 동원되어 제작비가 상승하는 황당한 상황이 일본에서는 벤시 단 한사람이면 충분했기 때문에 독자적인 발전이 가능했다.

심지어 일본인 이민자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던 미국에서 조차 벤시가 장난스럽게 대사 처리를 하는 무성영화, 아시아인이 주는 신비감으로 인해 ‘일본영화’는 관객들에게 만족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벤시들이 필사적으로 극장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을 즈음, 유럽과 미국에서도 이와 유사한 파동이 일어나기는 했다. 대규모로 편성된 오케스트라들이 영화관에 등장하면서 즉흥연주를 대체하여 영화의 장면에 알맞는 음악들(긴장, 클라이맥스, 로맨스 신, 일반적이고 명랑한 신, 서정적이고 슬픈 장면 등)을 차츰 지휘자들이 분류하여 편곡한 후 ‘영화음악’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문제가 있었다. 저작권 문제와 함께 여기저기서 등장한 ‘영화음악’악보집이 발단이었다. 영화는 달랐지만 반주음악이 늘 똑같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러브신에는 차이콥스키의 ‘꽃의 왈츠(Valse des Fleurs)’나 구스타프 랑게의 ‘꽃노래(Blumenlied)’ 등이, 슬픈 장면에는 게타노 브라가의 ‘천사의 세레나데(La Serenata, Leggenda Volacca)’, 베토벤의 ‘비창(Pathetique)’, 결투 장면에는 로시니의 ‘윌리엄텔 서곡(William Tell Overture)’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다 보니 관객들은 음악만 들어도 스토리가 대충 이해가 갔고 이 때문에 극장의 전속 가수가 등장하여 영화의 장면과 장면 사이 혹은 막간을 이용하여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중 대표적 인물이 앨 존슨(Al Jolson)으로, 훗날 세계 최초의 토키영화인 재즈 싱어(The Jazz Singer, 1927)의 주연을 맡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비록 흥행했다고 하더라도 그 수입의 태반이 악사들과 가수들에게 돌아갔기 때문에 수익성은 떨어졌고 이와 동일한 아이러니가 일본영화계에도 일어났는데 바로 ‘벤시’였던 것이다.

일본영화가 출범한 후 적어도 35년 가량 벤시들은 살아남았다. 1886년경, 환등(幻燈) 즉 슬라이드가 일본에 유행했을 때 이미 설명자가 있었다는 기록에서부터 1932년에는 파업을 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이는 소리 내어 이야기를 하는 만능예능인이 영화관에 상주한 특이한 경우였기 때문에 이들은 악착 같이 살아남았다.

벤시는 한 편의 이야기를 이끌어갈 뿐만 아니라 영화의 도덕적 교훈이나 의식을 설명하고 여러 목소리를 구사하는 일종의 만능 엔터테이너이면서 해설자이기도 했다. 영화의 상영속도를 자신의 이야기에 맞춰 자유롭게 조절하기도 하고 비평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벤시의 실력에 따라서 흥행은 물론 관객의 영화체험이 바뀔 수도 있었다. 또 한 장면을 변사의 장기를 자랑할 수 있는 긴 대사를 연기하기 위해 설정했는데, 빈번하게 삽입하다 보니 일본영화만의 독특한 촬영기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단적인 예가 롱샷(Lons shot)이나 롱테이크(Long take) 같은 기법이며, 내레이터를 통해 극을 이끌어가거나 감상적인 독백 삽입 등도 벤시의 영향이다.

한동안 관객들은 벤시의 호감에 따라 영화를 선택했다. 그러다 보니 배우들이나 제작자, 감독, 극장주, 영화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팬덤을 형성하기도 했다. 다만 영화를 자신들의 퍼포먼스를 위한 소재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때로는 과도하게 선정적인 대사를 남발하거나 에로틱한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벤시들이 인기를 얻었다.

또한 일본영화의 영향을 받은 강점기하의 조선에서는 벤시들이 대본에 나와 있는 일본어가 아닌 즉흥적 한국어로 민족주의를 고무하는 연설을 하여 관객들을 열광시키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이에 따라 벤시 면허제도가 도입되었고 벤시의 연설은 국가의 검열, 관리 대상이 되었다. 처음 출발이 서양에서 들어 온 영화를 일본의 전통적인 연극적 흐름 속에서 수용한 결과물이 벤시이기도 했지만 ‘몸 따로 목소리 따로’에 익숙한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영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변하고 있었다. 무성영화의 자막을 읽을 수 있는 관객들이 늘기 시작했고 토키영화에 대한 시도가 늘었으며 심지어 1931년에는 폰 슈테른베르크의 ‘모로코’를 상영하면서는 자막을 넣으면서 아예 벤시를 제외시켜 버렸다.

외적으로는 영화 외에도 가부키나 분라쿠라는 대중연극이 지속 되었기에 연극적 퍼포먼스 영화는 익명의 관객들에게 외면 받았다. 특이하게도 이탈리아와 독일 등은 외국영화에 자국 성우의 음성을 더빙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일본과 프랑스는 싫어했다.

하여 이들 중 상당수는 시대를 읽고 변신했다. 희극배우와 또 다른 신매체로 등장한 라디오에서 만담꾼으로 활동하고 영화제작자나 극장주가 되기도 했다. 영화관 전속 악사들은 광대 복장으로 거리의 악사로 진출,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갔다.<이훈구 시나리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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